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로마 내전 (문단 편집) ==== [[네 황제의 해]] ==== ||<-3><:> '''[[네 황제의 해|{{{+1 {{{#FFBF00 네 황제의 해 [br] Annus Quatuor Imperatorum }}}}}}]]''' || ||<-3><:> {{{#BA0E09 68년}}} || ||<:> '''{{{#FFBF00 주요 황제}}}''' ||<-2>[[갈바]][br][[마르쿠스 살비우스 오토|오토]][br][[비텔리우스]][br][[베스파시아누스]] || ||<-3> || ||<-3><:> '''[[역대 로마 황제|{{{#FFBF00 로마 제국의 왕조}}}]]''' || ||<-2><:>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br] 왕조]] ||<^|1> [[플라비우스 왕조]] || AD 68년, 국가의 적으로 선포된 [[네로]]의 자살 이후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는 붕괴됐고,[* 네로가 몰락하기 전, 아우구스투스 직계혈육들은 피소 음모 당시 설계자로 누명을 뒤집어 쓰고 처형된 [[클라우디아 안토니아]] 공주의 억울한 죽음을 끝으로 끊긴 상태라서, 네로가 가진 아우구스투스 혈육이라는 후광 효과는 사라진 상황이었다. 네로가 어머니 소 아그리피나를 통해, 입양을 통해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계승자이자 아우구스투스 혈육이라고 해도, 그는 [[칼리굴라]]의 공식 선언을 통해 아우구스투스 일가의 계승권이 보장되지 않은 타 가문 사람에 불과했다. 그래서 네로의 모후 아그리피나는 [[클라우디아 옥타비아]]를 네로와 결혼시켜 이 단점을 상쇄하고자 했다. 하지만 네로는 제 손으로 처남, 어머니를 죽인 뒤 클라우디아 옥타비아를 민중, 원로원 반대에도 이혼 후 간통죄를 뒤집어 씌워 제거해 이미 정통성이 반쯤 박살난 상태가 됐다. 더욱이 증거 없이 고변을 받았다는 이유로 피소 음모, 베네벤툼의 음모가 터트려,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지지세력과 방계 황족들을 거진 죽여 빈덱스 반란 직전 이미 네로는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황제임에도 가짜 황제와 다름없는 처지가 됐고, 이는 그가 어이없이 무너진 원인이 된다.] [[갈바]]가 황제에 오르게 되었다. 갈바는 [[티베리우스]], [[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 1세]] 시대까지 유능하고 용감한 장군이자 행정가이며 정치가로 존경받던 원로 총독이었다. 그는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오랜 친구였고, 히스파니아 속주 총독에 있으면서 유능하기로 이름이 난 터라 모두의 기대를 받으며 제위에 올랐다. 그러나 그는 70이라는 나이가 무색하게 갖은 [[삽질]]만 저지르며 실망을 안겼다. 설상가상 본인의 즉위를 도운 1등공신 [[마르쿠스 살비우스 오토|오토]]를 토사구팽하면서도 그를 완전히 제거하지 않는 실책을 저지른다. 결국 그는 근위대를 포섭해 반격한 오토 손에 살해당했다. 오토는 제위에 오르자마자 갈바의 똥을 치워야했는데, 바로 게르마니아 속주 총독이었던 [[비텔리우스]] 역시 갈바가 살해당할 즈음 황제를 칭하고 반란을 일으켜 이탈리아로 진군했다.[* 알다시피 이땐 교통이나 통신이 지금과 비교하면 매우 느렸기 때문에 오토가 갈바를 살해한 것도 모르고 비텔리우스는 반란을 일으켰다.] 오토는 네로, 갈바가 연이어 싼 똥을 치우는 와중에 게르마니아 정예병력을 이끌고 온 비텔리우스와 내전을 치룰 처지가 됐다. 이에 그는 비텔리우스 측에게 협상을 시도하는데 이는 실패로 돌아갔고, 두 세력의 충돌은 비텔리우스의 승리로 돌아간다. 절망한 오토가 자결하면서 제위는 다시 비텔리우스에게 넘어가게 된다. 비텔리우스는 애당초 황제는커녕 원로원 의원으로도 형편없는 위인으로 부도덕한 아부쟁이였다. 따라서 비텔리우스는 오토가 미처 치우지 못한 네로, 갈바의 폐단을 끊기보다는 끊임없는 [[삽질]]을 저지른다. 로마에 도착하기도 전에 오토의 지지층을 가혹하게 탄압했으며[* 특히 정신나간 짓거리가 있었는데 오토의 지지층이자 로마 국경 방어의 핵심이었던 도나우 강 수비대의 [[백인대장]]들을 싸그리 처형시켜버렸다. ~~이짓을 하고도 국경선에 구멍이 안 뚫린 게 신기~~ ~~아닌 게 아니라 갈리아 일대에서 반란이 일어나기는 했다. 비텔리우스의 뒤를 이은 베스파시아누스가 재빠르게 진압해서 별로 부각이 안 된 편일 뿐~~], 자신의 병사들을 로마 시내에서 야영시키는가 하면, 하라는 통치는 안 하고 허구한 날 향락만 즐겼다. 설상가상 원로원, 근위대, 속주총독, 로마군 모두에게 국가의 적으로 공인돼 몰락한 네로를 정식 신원복구하겠다고 하면서 일을 더 키웠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자, 비텔리우스에 대항하여 한 번 더(...) 봉기가 일어난다. 이번에 봉기를 일으킨 인물은 당시 유대 총독으로 유대인들의 반란을 진압하고 있었던 [[베스파시아누스]]. 베스파시아누스는 경매업, 고리대금을 가업으로 삼던 기사계급 출신으로 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 아래에서 뛰어난 행정 능력, 눈치, 충성심을 바탕으로 귀족까지 오른 실력자였다. 그는 장군으로서도 유능한 인물이었는데,[* 물론 [[카이사르]]나 [[아우구스투스]] 같은 먼치킨이랑 비교하면 후달리지만, 그래도 [[명군]]의 자질은 충분히 갖춘 인물이었다. --애시당초 세계사에 꼽히는 인물들인 저 2명이랑 비교하면 누구나 초라하게 보일수밖에 없다...-- 다른거 안 보고 이런 난세를 잘 끝낸것 만으로도 유능한것은 확정.] 그를 보좌한 장남 [[티투스]]를 비롯한 측근들 역시 상당히 유능했다. 이런 상황에서 이탈리아 본토의 [[비텔리우스]]는 [[아무것도 안하고 싶다|이미 아무것도 안 하고 있지만 더욱 격렬하게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를 시전하면서 민심까지 잃어버린다. 따라서 베스파시아누스는 손쉽게 비텔리우스를 제거하고 제위에 오르게 된다. 이렇게 제위에 오른 베스파시아누스는 내란을 방지하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원로원을 설득하여 제위 상속제를 실시했고 그 결과 [[플라비우스 왕조]]가 창설된다. 한편 '갈바의 살해 - 오토와 비텔리우스의 전투 - 오토의 자살 - 비텔리우스와 베스파시아누스의 충돌 - 베스파시아누스의 즉위'라는 일련의 과정이 모두 68년 한 해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로마인들은 이 해를 '네 황제의 해'라고 불렀다. ~~그리고 [[타키투스]]는 '제국이 ㅈ망할 뻔한 해'라고 불렀다.~~ 여담으로, 먼 훗날의 [[동로마 제국|동쪽 로마]]에서도 [[641년]] 한 해에 황제가 4명 존재했다. 고대 로마와의 차이점은, [[이라클리오스 왕조|한 왕조 내의]] ~~[[출생의 비밀]]이 함유된[* 숙질 간의 근친혼이 있었다.]~~ 집안 싸움이었다는 점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